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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보장하지 않는 세월 - 장애인 노동 착취 사건과 소멸시효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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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북연구소 작성일19-05-13 10:57 조회3,9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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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을 오래 학대할수록 가해자가 이득을 보는 법이 있다. 소멸시효 제도다. 소멸시효란, ‘권리’에 유효 기간을 정해놓고 기간 안에 행사하지 않으면 권리를 소멸시키는 제도다.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전제다. 길게는 수십 년간 학대당한 장애인들이 이 제도로 10년 치 보상밖에 못 받고 있다.

 

오래된 권리는 사라진다

권리를 지켜줘야 할 법이 되레 권리를 없애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정해 보자. 어느 날 누군가가 찾아와 십여 년 전 돈을 빌렸으니 갚으라고 한다. 당신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가 건넨 계약서를 보고 겨우 기억을 떠올린다. 오래전 돈을 빌렸고, 역시 오래전 돈을 갚았다. 그런데 상대방은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당신에겐 영수증이 없다. 한동안 갖고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버렸거나 잃어버렸다. 10년도 더 지나 다시 돈을 달라고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곤란한 상황이다. 상대에겐 당신이 돈을 빌렸다는 증거가 있고, 당신에겐 그걸 갚았다는 증거가 없다. 이렇듯 채무자가 입증하기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법은 오랜 시간이 지난 권리를 없앤다. 그렇게 해서 입증을 못 하거나 기억하지 못해 돈을 두 번 갚는 일도 막는다.

돈을 갚지 않았었다고 다시 가정해 보자. 시간이 지나도 갚으라는 말이 없자 당신은 어느 순간 그것을 안 갚아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법은 그 기대가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또 상당 기간 돈을 갚으라고 요구하지 않은 채권자는 권리 위에서 잠을 잤으므로 보호하지 않는다. 이로써 법적 안정성이 유지된다. 소멸시효의 기간은 채권 종류에 따라 다르다. 기본적으로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시점부터 10년이다.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권리는 사라진다.

 

10년 이상 학대당한 탓이다?

황 모(당시 48세) 씨는 남편이 사망한 뒤, 시아버지의 사촌형제에 의해 2001년 9월 충남 당진에 있는 한 과자 공장에 보내졌다. 다음해 아들 최 모 씨(당시 23세)가 엄마인 황 씨를 찾아왔다. 모자는 지적장애인이었다. 둘은 공장 옆 조립식 단층 건물에 살며 주 6일을 매일 10시간씩 일했다. 쌀을 운반해 빻아 튀긴 다음 자루에 담고 옮기는 등의 노동이었다.

일요일 등 공휴일이나 공장에 일이 없는 날은 밭에서 풀을 매거나 공장 주인의 집안일 등을 했다. 임금은 받지 못했다. ‘농노’와 같은 생활은 약 15년간 이어졌다. 2016년 10월 신고를 받고 찾아온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센터 직원들에게 구출됐을 때 모자는 각각 63세, 37세가 돼 있었다. 그간 공장주 정 모 씨는 임금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황 씨 통장으로 들어온 장애인 연금과 국민연금 중 약 2천만 원을 사용했다.

정 씨는 2017년 8월 근로기준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 횡령 및 장애인복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와 상고가 모두 기각되며 유죄 판결이 확정됐다. 뒤이어 모자는 부당이득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 3월 1심 판결이 내려졌다. 재판부는 피고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부당이득반환청구권의 소멸시효인 10년을 적용해 손해배상액을 산정했다. 따라서 황 씨는 2001년 9월부터 2008년 1월까지 약 7년, 최씨는 2002년 6월부터 2008년 1월까지 약 6년 동안 자신들이 당한 노동 착취에 대해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됐다. ‘보상을 못 받는 건 10년 이상 학대당하느라 권리를 행사하지 않은 피해자 탓’이라고 판결이 말한 셈이다. 소송을 대리한 원곡법률사무소 유승희 변호사는 “이번 건뿐만 아니라 사무소에서 진행한 열 건의 장애인 학대 사건에 대한 손해배상소송 모두 10년의 소멸시효가 적용됐다”라고 밝혔다. 유 변호사는 “소멸시효는 채무자도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예외적 제도”라며 “예외적 제도가 장애인 학대 사건에 적용돼 피해자의 권리 구제를 제한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과거사 사건에 기존 소멸시효 적용은 위헌

민법

제166조(소멸시효의 기산점) ①소멸시효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로부터 진행한다.

제766조(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①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의 청구권은 피해자나 그 법정대리인이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간 이를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인하여 소멸한다. ②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을 경과한 때에도 전항과 같다.

2018년 8월 헌법재판소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서 규정한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과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조작의혹사건’에 일반적인 소멸시효를 적용하도록 한 민법 제166조 1항과 제766조 제2항은 헌법에 위반한다고 결정했다. 두 사건 유형은 “국가가 현재까지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채무를 변제하지 않은 것이 명백한 사안”이라 채무자의 이중 변제 위험이 없고, “국가가 소속 공무원을 조직적으로 동원해 피해자의 권리를 장기간 저해한 사안”인 만큼 '채권자의 권리불행사에 대한 제재 및 채무자의 보호가치 있는 신뢰 보호'라는 소멸시효 입법 취지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결정 근거였다. 헌재는 “민법 제166조 제1항과 제766조 제2항의 객관적 기산점을 위 유형 사건에 적용한다면 소멸시효 제도를 통한 법적 안정성과 가해자 보호만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합리적 이유 없이 위 사건 유형에 관한 국가배상청구권 보장 필요성을 외면한 것”이라고 밝혔다.

헌재의 결정에 이어 지난달 4일 바른미래당 이태규 의원은 공무원의 고의 또는 중과실에 따른 불법행위 등의 국가 범죄에는 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도록 하는 민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이 통과되면 앞으로 국가의 불법행위로 피해를 본 당사자나 유족은 소멸시효 제한 없이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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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 위에서 잠잔 게 아니다

지난달 18일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는 장애인 학대 사건에 기존 소멸시효 제도를 그대로 적용하는 건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경북연구소 최성 소장은 기자회견에서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법도 보호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잠잔 게 아니라 알 수 없던 사람들은 어떻게 권리를 구제받아야 하나”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전남연구소 손영선 소장은 “당하는지도 모르고 학대당했는데, 10년이 지난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는 게 법인가”라고 물으며 “법이 장애인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사회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헌법소원을 청구한 법조항은 민법 제162조 제 1항과 제166조 제1항, 근로기준법 제49조다.

민법

제162조(채권, 재산권의 소멸시효) ①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소멸시효가 완성한다.

제166조(소멸시효의 기산점) ①소멸시효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로부터 진행한다.

근로기준법

 

제49조(임금의 시효) 이 법에 따른 임금채권은 3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소멸한다.

헌법소원 청구를 대리한 유승희 변호사는 “장기간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장애인 학대 사건의 피해자는 대개 지적장애인이다. 피해자는 자신이 정확히 어떤 피해를 입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는 피해 장애인의 전반적인 생활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폭행과 가혹행위를 동반하기도 한다. 따라서 제삼자가 발견하고 신고하기 전에 피해자 스스로 학대 현장을 벗어나기 어렵다”라며 “피해자가 자신의 권리를 알 수 있었고, 행사할 수 있었다며 일반적인 소멸시효를 적용하는 건 부당하다”라고 주장했다.

과거사 사건에 일반적 소멸시효 적용 위헌 여부를 판정하며 헌재는 채무자의 입증 곤란함과 이중 변제의 위험이 없는데 소멸시효를 그대로 적용하면 법적 안정성과 가해자 보호만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장애인 학대 사건도 형사 재판을 통해 임금을 주지 않은 것이 확실히 밝혀진 만큼 입증 곤란이나 이중 변제 위험이 없다. 유승희 변호사는 “가해자는 자신이 직접 불법적 상황을 만들었고, 피해자가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가두었다. 따라서 가해자는 보호할 만한 채무자가 아니다. 가해자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 하는 건 권리남용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소멸시효의 입법 취지에서 남는 건 법적 안정성이다. 헌재는 법적 안정성보다 배상받을 권리가 중요하다고 판정했다.

 

세월을 보상할 순 없지만

장애인들이 장기간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2014년 ‘신안 염전 노예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다음해 더불어민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인재근 의원이 “노동력 착취 사건의 경우 사용자의 강요 또는 기망으로 임금 채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때에는 그 임금 채권을 행사할 수 있을 때까지 소멸시효가 진행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의 근로기준법을 대표 발의했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지난 2월 더불어민주당 설훈 의원의 대표 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이 개정안에는 기존 근로기준법 제49조에 “강제 근로 등의 임금 채권은 사용자와 근로자의 근로 계약이 종료된 날 또는 근로자의 법정대리인이 강제 근로 등의 사실을 안 날 중 먼저 도래한 날부터 기산한다”라는 내용이 추가됐다.

장애인 학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 어디선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은 2018년 상반기 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 신고·접수된 장애인 학대 의심 사례 총 347건 중 218건을 ‘경제적 착취’로 분류했다. 그중 27건은 장애인 모자 학대 사건, 염전 노예 사건과 유사한 노동력 착취 사건이었다. 피해자는 사실상 모두 지적장애인이었다. 피해 기간은 평균 16.5년이다. 네 명은 무려 40년 동안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소멸시효 적용을 받는다면 30년간의 노동 착취는 보상받지 못한다. 누구도 지나간 세월 자체를 보상해줄 순 없다. 고작 손해배상이 사회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이다. 현행 소멸시효 제도는 그것마저 빼앗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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